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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부정공>양벽정제명기(漾碧亭題名記)
漾碧亭題名記 江南多臨觀之勝滕王閣爲第一如無賓主東南之美落霞秋水之句何以揄揚於天下後世耶大抵湖南之昇平亦稱以小江南而漾碧亭爲第一者何哉昔我先子三灘公與金河西白玉峰兩先生爲賓主東南之美而鄭松江趙重峰詩語不下於落霞秋水之句則使此亭在於古之江南則臨觀者於滕王閣豈無同日而語哉漾碧爲義未敢知而漾者隴西水名與圣羕羕同水長也碧者石之靑美深靑也亭下有醉岩石石下有醉岩沼沼之水長而自廣川南來與隴西水不同也岩之石有三層上而磏中而磏下而碏色不深靑也以字之爲體見之則漾字洋洋水也碧字磨玷白玉在於石上也昔夫子將西見趙簡子聞竇鳴犢舜華殺死臨河歎曰美哉水洋洋乎某之不濟此命也南容三復白圭之玷尚可磨也斯言之玷不可爲也然則公生仁明之世見乙巳禍機筮遯林泉築亭終老與河西先生結交講論爲黨錮完人則臨河之歎相符也與玉峰先生石上題名清芬不磨則三復之工可見也抑或此意耶龍蛇之變亭遂邱墟爲臨觀者嗟歎矣何幸壬午夏淵齋宋先生來臨于此有地不忍荒水不忍廢之語其時從遊實鄭三芝金砥齋二公即河西松江兩先生後也祖先杖屢之地爲其子孫者豈無曠感哉因人顯地以此謂也耶美哉亭也於水見河西淵源之大且深為於山見玉峰功簣之高於人見三灘公則前題得河峰而益彰後題得淵齋而煥然前題雖有主名後題勿以無主爲嫌也承名後題而主張乎其間者鍾悳基永也淵齋門弟鍾悳是三灘公十二世孫而於余爲同庚同門同族之叔也 後孫 學洙 謹記 양벽정제명기(漾碧亭題名記) 강남에 찾아볼 만한 많은 승경(勝景) 가운데 등왕각(滕王閣)이 제일이라고 하나 만일 손님과 주인 동남의 아름다움과 저녁노을, 가을 물의 구절이 없었더라면 어찌 천하 후 세에 알려졌겠는가. 대저 호남땅 승평을 또 소강남(小江南)이라 하고 그 가운데 양벽정이 제일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옛날 우리 선자 삼탄공이 김하서(金河西) 백옥봉(白玉峰) 두 선생과 더불어 동남(東南)에 빈주(賓主)의 아름다움이 되고 정송강(鄭松江) 조중봉(趙重峰)이 시와 말이 낙하추수(落霞秋水)의 구절보다 못한 바 없으니 이 정자가 옛 강남에 있었더라면 구경 온 사람들이 등왕각⑱과 같은 위치에 놓고 말하지 않았겠는가! 양벽이란 뜻은 감히 안다고 할 수 없으나 내가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양자는 농서수명(隴西水名)인데 양(漾)자와 더불어 물이 길다는 것이요, 벽 자는 푸른 돌이 아름답고 더욱 푸르다는 뜻이다. 정자 아래에는 취암석(醉岩石)이 있고 바위 아래에는 취암소가 있는데 못의 물이 굽이굽이 광천에서부터 남쪽으로 흘러오기 때문에 농서수와는 같지 않고 바윗돌이 三층이 되어 상은 붉은 빛이요, 중은 검은 빛이며 아래는 얼룩빛으로 그다지 푸르지 않다. 글 자체로서 보면 양(漾) 자는 넓고 큰물이요, 벽(碧) 자는 티를 간 흰 옥이 돌 위에 있는지라 옛적에 공자가 서쪽으로 가서 조간자(趙簡子)⑲를 보고 터놓아서 우는 소야지가 무궁화를 밟아 죽였다는 말을 듣고 하수를 굽어보며 탄식하되 아름답다 물의 넓고 큼이여, 某의 건너지 못한 것은 명이라 하였고, 남용(南容)⑳이 세 번 되풀이하되 흰 옥의 흠점은 오히려 갈아서 없게 할 수 있거니와 이 말의 흠점은 그렇게 할 수 없다 하였다. 그런즉 공이 인종(仁宗) 명종(明宗) 때에 태어나서 을사사화의 기틀을 보고 처음 임천에 숨어 정자를 짓고 늙도록 하서(河西) 선생과 사귀고 강론하며 붕당을 떠나 완인이 되었은즉 하수를 굽어보며 탄식한 것으로 서로 부합하고 옥봉(玉峰) 선생과 함께 돌 위에 이름을 새겨 맑은 향기가 가시지 않고 있으니, 세 번 반복한 공부를 가히 볼 수 있겠다 아마 이런 뜻이 아닐까! 임진왜란 때에 마침내 정자가 구허가 되어 와서 보는 사람들에게 쓸쓸한 마음을 갖게 하더니, 다행히 임오년 여름에 연재(淵齋) 송 선생이 이곳에 찾아와 땅을 차마 거칠게 할 수 없고 물을 차마 폐할 수 없다는 말을 남겼다. 그때에 함께 온 정삼지(鄭三芝) 김지재(金砥齋)는 곧 하서, 송강 두 선생의 후손이니 선조가 상양(徜徉)한 땅에 그 자손 된 자 어찌 아득한 감상이 없겠는가. 사람으로 인하여 땅이 이름난다는 것이 이를 이름인가. 아름답다, 정자여, 물로는 하서 연원의 크고 갚음을 보고 산으로는 옥봉의 한 삼태기 채운 공을 보며 사람으로는 삼탄공을 보니 먼저 제명에는 하서, 옥봉을 얻어 더욱 빛나고 뒤 제명에는 연재를 얻어 더욱 밝으니 전제(前題)에는 주인 이름이 있고 후제에 없는 것을 탓하지 말지어다. 후제 각명을 그 사이에서 주장한 자는 종덕(鍾息) 기영(基永)이요, 연재 문하생 종덕은 삼탄공의 十二세손인데 나와 나이가 같은 동문수학인 동족의 숙이었다. 後孫 學洙 삼가 기록함 註: ⑳남용(南容): 공자 제자로 남궁(南宮)에 살았으며, 이름은 괄(适). 자는 자용(子容). 시경(詩經)의 백규(白圭)장을 자주 외우며 말조심에 유의하였음. 등왕각(滕王閣): 중국 강서성(江西省) 신건현(新建縣)의 서쪽 장강문(章江門) 위에 있으며 등왕 이원영(李元嬰)이 세운 건물. 왕발(王勃) 조간자(趙簡子): 춘추시대의 진(晋)나라 사람인 조앙(趙鞅)을 말함. 간(簡)은 시호. 정송강(鄭松江): 一五三六〜一五九三) 이름은 철(澈), 본관은 연일(延日), 기대승(奇大升), 김인후(金麟厚), 양응정(粱應鼎)의 문인 예조판서 대사간 등을 지냈으며 서인의 거장으로서 당쟁에 몸을 던져 파란곡절을 겪었음. 시가에 능하여 송강가사와 많은 시조를 지어 국문학에 공헌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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